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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희대학교 봄 풍경

    설립자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땅을 보라"라는 마지막 시어를 남긴 설립자는 미원 조영식 박사입니다. 그는 서울고등학교 교사로 시작하여 경희학원, 경희중고등학교, 경희여자고등학교의 초대 총장 및 교장을 역임을 했으며, 경희대학교 제1대, 제3대, 제7대, 제8대 총장을 맡아 학교를 위에 일을 했습니다. 학교는 1947년 신흥무관학교를 잇는다는 명목으로 설립한 신흥전문학원을 1949년 2년제 전문대학인 신흥초급대학을 설립했지만 정식 인가는 못 받은 상태에서 6.25로 인하여 부산으로 옮겨졌습니다. 조영식 박사는 일제 강점기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되자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도모하다 고초를 겪었습니다. 옥중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세계 내 생성과 변화의 원리를 탐구한 전승화 철학을 기초했습니다. 인간과 세계, 문명과 우주를 잇는 사유체계의 밑그림을 그렸으며 광복 후 서울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새 나라 건설에 이바지할 마음으로 정치에 나섰으나, 혼탁한 전치 현실을 겪고 인지하며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이 더 절실하다고 판단했습니다. 1953년 휴전 이후 현재 위치인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 소재로 옮겨왔으며 1960년 경희대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어 찬란한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교명인 경희대는 조선 영정조 시대의 치세가 펼쳐진 조선시대의 정궁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폐허를 딛고 문예를 부흥시킨 조선시대 후기처럼, 6.25로 피폐해진 이 땅에 다시 문화적인 르네상스가 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명명되었습니다. 경희는 '학원의 민주화, 사상의 민주화, 생활의 민주회'를 교훈으로 설정해 진리 탐구와 함께 농촌 운동, 잘살기 운동, 밝은 사회 운동, 인류 사회 재건 운동, 네오 르네상스 운동 등을 펼쳤습니다. 또한 그는 제창하여 1965년 영국 오스퍼드 대학교에서 첫발을 내디딘 세계대학총장회는 학술 및 교육 기관의 지구적 존엄을 모색했습니다. 조영식 박사의 사상은 두 개로 전개됐습니다. 하나는 교육을 통해 세계를 배우고 인간을 성찰해 미래를 열어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적 실천을 통해 평화의 여정을 열어간다는 것으로 주의생성의 원리라고 생각한 그의 사상에 면면히 흐르는 인식의 기초는 현대의 제약과 한계, 편견 너머 존재하는 인산의 보편적인 가치, 더 나은 세상의 미래를 향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저술 등에 나타난 민주주의론이나 세계평화론 등의 주장과 사상은 그 개념의 깊이나 현실적 적용의 측면에서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며 대한민국 사상계나 학술계에 미친 영향은 미미하다고 평가되었습니다. 하지만, 학원 경영에 있어서는 탁월한 수완을 발휘했고 폐교 직전의 학교를 인수하여 대학교로 크게 성장 및 발전시켰으며, 동양의과대학을 인수해 한의과 대학, 의과 대학, 치과 대학, 양약과 한약의 약학 대학, 간호학과 등 의약 계열의 모든 학과를 아우르는 종합 의약체계와 유치원부터 대학원까지 갖춘 종합 학원의 면모를 만든 그는 2012년 향년 90세의 일기로 사망하여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신흥무관학교

    1907년 국내의 애국지사들이 항일비밀조직인 신민회를 결성했습니다. 신민회는 이 시대에 국권 회복을 목표로 하여 조직된 항일 단체로서, 신민회는 실력 양성의 방법을 통하여 국권을 회복하고 많은 항일 단체 중 최초로 민주 공화정체의 국민 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했습니다. 이러한 단체가 중국 만주 서간도에 토지를 구입하고 학교를 설립할 이주민과 군자금 모집에 착수를 했습니다. 그 결과 국내에서 모여드는 청년들에게 구국이념과 항일정신을 고취시켜 조국광복의 중견간부로 양성시킬 목적으로 신흥강습소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이었습니다. 본관이 낙성된 뒤, 1913년 신흥중학교로 개칭하고 중학반과 군사반을 두었다가 중학반은 폐지하여 지방중학에 인계하고 군사반만 전력하였으며, 각지에서 애국 청장년들이 모여들면서 전부 수용할 수 없게 되자, 1919년 고산자가로 이전함과 동시에 신흥중학교를 점진적으로 폐교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그러나 학교를 설립한 주요 인물 중에 있는 이시영과 이동녕이 봉천과 러시아령으로 각각 떠나는 사건으로 인해 권위 있는 독립투사 양성기관이자 명실상부한 독립운동의 요람이었던 신흥무관학교는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절망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기백과 묵묵히 참고 일을 쫒으며 각 마을을 전전하면서 구걸하여 학생들의 굶주림을 달래며 학교의 명맥을 유지해 나갔습니다. 신흥무관학교는 기본적으로 무관학교였으므로 군사교육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습니다. 이때 사용된 일본군의 병서와 중국군의 병서를 바탕으로 우리에게 맞게 새롭게 만든 것들이었습니다. 한편 신흥무관학교에서는 군사교육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민족정신 함양에도 노력하였는데 그것은 투철한 민족의식을 가진 인재양성이 일제를 물리칠 수 있는 중요한 방법의 하나라고 인식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흥무관학교에서는 그 방편으로 우리나라의 국어, 국사, 지리교육을 강조하였습니다. 학교가 만주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졸업생들은 대부분 만주에서 활동하였는데 그들이 활동했던 대표적인 무장독립운동단체입니다. 그 밖에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만주지역의 대한통의부, 정의부, 신민부, 국민부 등 주요 주무장독립운동단체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이처럼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학교가 폐교된 이후에도 만주와 중국본토의 여러 독립운동단체에서 각각 활발히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학교는 해방 이후 자금난으로 인하여 조영식 박사에 의해 경희대학교가 인수하였습니다. 2018년 이후 경희대학교 학내에서 신흥무관학교와 관련한 의제의 공론화가 많이 이루어졌고 재학생 대표기관인 총학생회와 졸업생 대표기관인 총동문회가 서로 만나 신흥무관학교를 경희대학교의 역사로 인정하는 내용을 담은 경희역사 교육을 위한 협약식을 체결하였습니다. 경희대학교가 신흥무관학교를 계승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특강 개최, 경희역사연구소 건립 등을 추진하는 등 경희대학교와 신흥무관학교의 역사적 연결성을 되찾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경희의료원

    경희의료원은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에 위치한 경희대학교 의과대학의 부속 병원으로 경희대학교의료원의 본원에 해당합니다. 서울시내 유일하게 의대 병원, 치과 병원, 한방 병원을 함께 운영하는 의료기관입니다. 경희의료원의 명칭이 보통 '병원'이라는 단어를 쓰는 대신 '의료원'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다른 대학병원들은 일반적으로 의료법인인 산하에 개별 병원을 두는 반면에 경희의료원은 경희학원 산하에 운영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건복지부 2019년 의료질평가에서 최상위 등급을 받았습니다. 전국 상급종합병원과 종합병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의료질평가에서 의료질과 환자안전, 공공성, 의료전달체계 영역에서 1등급 중에서도 최상위 등급을 받았다. 조사대상 중 3개 영역에서 최상위 등급을 받은 의료기관은 7개 병원으로 이는 상위 2%에 해당되는 평가입니다. 치과병원은 경희대 정문 기준 의료원 맞은편, 독립건물로 운영 중입니다. 1991년 11월 지상 6층, 지하 2층의 독립 치과병원이 완공되어 보존과, 보철과, 구강외과, 소아치과, 치주과, 교정과, 구강내과, 영상치의학과의 8개 과의 전문치료를 합니다. 한방병원은 의대병원과 본관 입구를 같이 이용 중입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한방병원으로 경희대학교는 1971년 최초로 한방병원을 설립했고 1972년에는 세계 최초로 무통 침술마취에 성공했습니다. 1968년 세계 최초로 한의학 석사를 탄생시켰고 1974년부터 세계 최초로 박사과정이 개설되었습니다. 한의학 의료기관으로는 대한민국 제1의 브랜드 파워로 생산성 본부가 선정하는 브랜드 파워 1위를 단 한 번도 타 기관에 내어준 적이 없는 명실상부 자타공인 한방병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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