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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한양대학교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성동구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입니다. 한양대학교의 전신은 1939년 최초로 실용적인 기술교육을 목표로 하는 동아공과학원입니다. 설립자는 당시 25세였던 사업가이자 교육자이며 음악가였던 백남 김연준 박사였습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교명을 건국기술학교로 바꿨으며 건국기술학교는 1948년 7월 4년제의 정규대학인 한양공과대학을 거쳐 1959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하면서 한양대학교로 이름을 변경했습니다. 1953년 9월 서울시 성동구의 현재 캠퍼스로 교지 이전 및 교사 신축을 시작했으며, 1980년에 경기도 안산시에 제2캠퍼스인 ERICA캠퍼스의 설립인가를 받아 개교했습니다. 2003년 산학협력단을, 2007년 한국전기연구원 융합연구센터를 각각 설립했으며 2008년 8월 로스쿨 인가를 받았고, 9월 한양대학교 기술지주회사로 HYU홀딩스를 설립하고 2009년 7월 국내 최초로 글로벌기업가센터를 설립했습니다.
한양대학교는 최초로 학생 중심의 파격적인 입시 시스템을 도입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입시 전형 등 정보를 모두 공개하며 수험생 본인 확인 완료 시스템, 온라인 모의논술고사 실시 등은 오직 한양대만의 특화된 입시 시스템입니다.
또한, 1994년 국내 최초로 대학의 사회적 채임을 다하는 사회봉사단을 대학 안에 설립함에 이어 2012년 국내 최초로 졸업생 동문 사회봉사단을 창단하였으며, 국내 유일의 필란트로피 교양 과목을 개설해 운영을 통해 한양대학교는 건학정신인 사랑의 실천을 구현하고, 대학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지성인을 양성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추가로, 한양대학교는 동문후원창업센터를 국내 최초로 개설하여 학생들의 창업 지원을 하며, 동문과 대학이 협력하여 유망한 스타트업 회사를 발굴 및 지원해 글로벌 강소 기업으로 키우는데 노력하고 있습니다.
유일무이
한양대학교는 2003년 국내 대학 최초로 시도된 산학협력단은 대학의 신지식과 산업계의 만남으로, 대학 융복합 교육과 창의연구의 확산을 통해 산학협력의 새로운 모델을 창출해 왔습니다. 기술이전 사업화 역량은 이제 최초를 넘어 최고의 연구 성과와 기술혁신을 이뤄내고 있습니다. 산학협력단은 교직원과 연구원의 지적 재산을 보호하고 상업화하는 데 도움을 주며, 특허 출원, 라이선스 계약 및 분사 벤처를 통해 최첨단 연구 결과를 상업적 잠재력이 있는 유형의 제품 및 서비스로 변환하는 데 도움을 주며 연구원과 업계 파트너 간의 공동 연구 프로젝트를 촉진하고 산업별 과제와 기회를 다루고 혁신을 주도하며 학계와 산업계 모두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인 솔루션을 제공합니다. 또한, 혁신과 경제 성장을 주도하는 데 있어 기업가 정신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학생과 교수진의 창업을 지원합니다. 비즈니스 인큐베이션 시설부터 멘토링 프로그램 등재단은 기업가적 인재를 육성하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성공적인 벤처로 전환하는 데 도움을 주는 등 산업 훈련 및 평생 교육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며 지식의 한계를 뛰어넘어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가운데 산학협력재단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혁신 비전을 실현하는 데 핵심 파트너로 남아 있습니다. 한양대학교는 2014년, 교육부 주관 사업인 산학협력선도대학육성사업을 비롯하여 학부교육선진화선도대학육성사업, 대학특성화 사업, 브레인코리아 21 플러스사업, 고교 교육정상화 기여대학 지원사업, 중소기업청 기업가센터 주관대학 등 6개 사업에 선정되며 유일무이 6관왕에 빛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마지막으로, 한양대학교 류마티즈 병원은 국내유일, 최고 수준의 류머티즘 질환 전문병원으로 자리매김하였으며, 차세대 지능형 수술시스템 개발센터는 국내 유일의 보건복지부 지정 수술로봇 전문 연구소로 차세대 로봇 의료기술 체계를 정립하고 있습니다.
박항서 감독
박항서 감독은 서울의 3대 대학 축구부라고 소개할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하고 막강한 전력의 한양대학교 축구부 출신입니다. 군인이 장래희망이었던 1957년에 태어난 박항서 감독은 고등학교 축구부원들이 공을 차는 모습을 보자 공부보다 축구에 대한 열망이 강해져 그들 사이에 들어가 함께 땀 흘리고 싶었지만 신장 166cm에 비쩍 마른 체격, 경력조차 없는 범생이를 받아줄 축구부는 없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축구를 하고 싶었기에 축구부 감독과 절친한 사이였던 누나의 남편의 도움으로 겨우 축구부에 들어갔습니다. 경험이 없는 박항서 감독에게 기회가 올 리 없어 6개월간 후보 선수로 지냈고, 운동선수로 지내온 탓에 학사 관리가 미흡했던 그 시절 관행을 따라 제때 졸업을 못하고 1년을 유급했으며, 한양대학교에 입학 후 2학년이던 1978년 아시아 청소년 축구선수권대회에서 청소년 국가대표님 주장을 맡아 우승일 이끌었습니다.
그 후 많은 선수 생활 등을 지냈지만, 박항서 감독은 A 국가대표로는 한국과 일본의 경기에서 단 한경기만 뛰었으며, 그 후 축구 지도자의 길을 걸은 박항서 감독은 K리그 1부 리그 팀의 준우승을 이끌고, 2002 한일 FIFA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의 코치로서 임하며 대한민국을 4위로 이끄는 중축이 되었습니다.
박항서 감독은 2017년,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여 AFC U-23 챔피언십 준우승, 아시안 게임 축구 4위,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 진출 등 축구 불모지였던 베트남을 아시아 축구 강국으로 만들며 베트남의 국민적 영웅이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박항서 감독은 베트남 3급 노동 훈장, 베트남 우호 훈장에 이어 베트남 2급 노동 훈장을 받았으며, 베트남과의 국가 간 교류와 양국 간 우호 관계를 증진하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에서 수교훈장을 받았습니다. 박항서 감독이 축구의 황금 전성기를 만들어낸 베트남은 2026 월드컵 예선전에서 인도네시아에 크게 완파당하며, 베트남과 베트남 국민들은 다시 박항서 감독이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박항서 감독의 축구 인생과 베트남과의 인연이 기대가 되고 있습니다.